심리학

Adler의 생애와 개인심리학의 발달과정

나들e 2022. 8. 20.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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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ler187027일 비엔나의 유복한 유태인 가정에서 4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골연화증으로 네 살까지 걷지 못했으며 다섯 살 때에는 폐렴에 걸려 죽을지 모른다는 진단을 받기도 했다. Adler는 생의 초기부터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를 겪은 병약한 아이였다. 그는 이러한 질병 경험으로부터 커다란 충격을 받았으며, 이는 그가 나중에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질병과 더불어 동생 Rudolf의 죽음은 의사가 되고자 하는 그의 목표를 강화시켰다.

 

Adler는 어린 시절에 병치레를 많이 했기 때문에 어머니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아버지와는 좋은 관계를 맺었으나 '지그문트' 라는 형을 질투했기 때문에 청소년기까지 형제간 갈등을 경험했다. 동생이 태어나면서 어머니의 관심을 빼앗기게 되어 어머니에 대한 실망감으로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지 못한 듯하다.  이러한 초기의 가족경험이 훗날 Freud와 갈등적 관계를 유발하는 바탕이 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Adler는 형제나 또래들에게 열등감을 느꼈지만 신체적 한계를 보상하기 위해서 투쟁했으며 점차 많은 한계를 이겨냈다. Adler의 유년기 특징은 여러 형제자매들 속에서 병약함과 열등감을 극복하려 한 투쟁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Adler는 초등학교 시절에 공부를 잘하지 못해서 담임교사가 아버지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구두수선공 수련을 받게 하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교사의 조언을 일축하고 Adler를 격려했다. 그때부터 Adler는 공부를 열심히 하기로 결심하고 급기야 반에서 1등을 하였으며 교사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했다.

 

이러한 Adler 자신의 아동기 경험은 개인심리학의 이론을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 인간은 생물학적 조건과 환경적 제약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창조할 수 있다. 그 경험에 따르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동기는 어린 시절에 최초로 경험한 부적절감, 즉 열등감을 극복하고 우월성 또는 완전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Adler 자신은 타고난 신체적 한계와 운명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창조적인 삶을 실현한 인간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Adler는 신체적 질병에 시달리면서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으며 나중에 의사로 활동하면서 신체 결함(organ deliciency)이 개인의 성격과 자기상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도 했다

 

Adler는 비엔나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했으며 1895년에 의사 자격증을 획득하여 처음에는 안과의사로 개업했으나 나중에 일반의로 바꾸었다. 결국에는 신경학과 정신의학을 전공하였으며 아동의 불치병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Adler는 개인의 치료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서 아동 양육, 학교 개혁, 갈등을 야기하는 편견 등과 관련된 문제를 자주 거론했다. 그는 고난과 역경에 처한 일반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이해하기 쉬운 평범한 언어로 많은 강연을 하고 글을 썼다.

 

Adler1897년에 사회주의자 모임에서 만난 러시아 유학생 Raissa Epstein과 결혼하여 네 자녀를 두었다. 사회주의자인 아내의 영향으로 인하여 그는 남성과 동등한 여성의 권리를 옹호했을 뿐만 아니라 평등하고 민주적인 인간관계를 강조했다. Raissa는 결혼 후에도 사회주의 정당에서 계속 활동하였으며, Adler 부부는 당시 비엔나에 거주하던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인 Trotsky 부부와 자주 만남을 가졌다

 

1902년에 AdlerFreud에게서 '비엔나 정신분석학회'의 모태가 된 수요일 저녁모임에 초대를 받았다. 서로 알게 된 경위는 분명치 않으나 AdlerFreud의 초대를 받은 초창기 네 명의 의사 중 한 명이었다. 1907년에는 그의 유명한 논문인 기관열등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여 Freud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는 '비엔나 정신분석학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1910년에는 이 학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Adler는 인간의 근본적 동기에 대해서 Freud와 견해가 달랐다. Freud는 인간의 발달과정에서 성적 욕구를 중시한 반면, Adler는 사회적 요인들을 강조했다. 급기야 FreudAdler의 주장을 공허한 것이라고 비난했으며 과학적인 근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 차이를 경험하게 되면서 Adler는 마침내 Freud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이론체계를 모색하게 되었다.

 

1912Adler신경증적 성격을 발간하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이론을 발전시켰다. 개인의 행동을 생물학적 · 외적 · 객관적 원인으로 설명하기보다 심리적 · 내적 · 주관적 원인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개인심리학의 목표는 자신의 개념을 인간 전체에 과잉일반화하려는 Freud와 달리 고유한 개인을 이해하는 것으로 삼았다. 또한 인간의 근본적인 동기를 성적 추동이나 리비도가 아닌 권력 추구 또는 완전성의 추구로 대체하였다

 

Adler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의 군의관으로 참전하였으며 이러한 전쟁 경험은 인간 본성에 관한 그의 생각을 형성하는 데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Adler는 병사들 사이의 연대감을 관찰하며 '공동체 의식'이 인간의 기본적 동기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으며, 인간은 사회적 참여를 통해 인생의 의미와 자기가치감을 추구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열등감을 보상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고 사회적 참여를 통해서 인생의 의미를 추구한다는 개인심리학의 기반을 형성했다.

 

전쟁이 끝난 후 비엔나는 고아들로 가득 찬 혼란의 도가니였다. 이때부터 Adler의 사회적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비엔나의 여러 학교들에 상담소를 개설하여 운영하면서 교사와 부모가 함께 참여하는 공개적인 토론모임을 가졌다. 이것은 심리치료의 공개토론 모델(open forum model)로 알려져 있으며 공동체 정신건강 프로그램을 발달시키는 초석이 되었다.

 

1920년대부터 Adler는 강연활동을 통해서 유럽과 미국에 개인심리학을 보급하며 심리치료와 예방적 활동을 강조했다. 성인 환자의 경우, 그의 치료는 환자가 나타내는 증상에 숨겨져 있는 목적을 발견하고 실천하도록 돕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여러 곳에 아동지도 클리닉(child guidance clinic)을 개설했고 아동교육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활발한 사회적 활동을 펼쳤다.  이 당시에 그는 저명한 심리치료자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1927년에 발간한 개인심리학의 실제와 이론인간 이해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저술과 강연을 통해서 열등감 콤플렉스, 출생 순서, 공동체 의식과 같은 개인심리학의 주요한 개념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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